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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판 천하삼분지계 (天下三分之計) ] 나는 논한다

[ 현대판 천하삼분지계 (天下三分之計) ]

현재 대한민국의 천하를 제패하고있는 더불어민주당은 민심을 얻었기에 야당들은 이길 수 가 없다. 그러나 1당 독주체제는 이전 정권에서 여실히 보여주듯, 그에대한 폐단은 항상 오기 마련이였다.

대한민국은 양당체제로 확립되어 흘러가는가운데 과연 천하삼분지계는 성공할 수 있을까?

신문사들은 천하삼분지계를 논할때 "인물" 중심으로 논한다 이는 천하삼분지계의 중점적인 가치와 논리를 전혀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다.

문재인, 홍준표, 안철수 이 세명을 항상논하고는 했었다 ( 이번대선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천하삼분이 아니라 그냥 인물중심의 3파전인 선거일뿐이다.

유비가 제갈량을 삼고의 예로 모실때 제갈량은 유비에게 형주와 익주를 기반으로 "세발의 솥 형국으로 만들라" 라고 진언을 하였다.

결국 유비는 제갈량의 말을 받아들여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여 서촉을 얻어 황제가되었다. 이는 성공적인 천하삼분이다.

대한민국에서 천하삼분이 실현이 되려면 가장 중점적으로 보는것이 "지역적 기반" 을 먼저보아야한다.

정치 아젠다의 가장 큰 뿌리를 보아야한다는것인데, 민주당은 보통 호남계 인사들이 많고 서울 경기쪽이 상대적으로 지지층을 넓게 형성하고있다. 자유한국당은 영남권에서 그나마 기반을 쥐고있는 당이다. (현재 지지율이 좀,,,,)

보통 대한민국의 "제3당" 같은 경우 정치적인 이합집산으로 합당했다가 다시 새로운 정당을 만들기도했다 이는 채 10년을 가질 못했다.

사실 현재 내가 소속되있는 "바른미래당" 도 마찬가지이다.

한쪽은 영남, 한쪽은 호남의 지역적 뿌리 체제를 가지고있다. 바른미래당이 제 3당으로 도약하려면 영남과 호남의 중요성도 있지만 새로운 지역을 찾아 개척해 기반화를 해야한다고 본다.

그 지역은 인구 155만이 살고있는 "강원도" 지역이다. 제 3당이 오랫동안 유지가 되고 독립적인 정당이 되려면 반드시 지역적인 지지기반을 가져야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 천하삼분지계를 실현한 제갈량도 형주 > 익주 이 두개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1-1 구도였던 삼국지 판도에 1-1-1 구도를 만들어 천하를 삼분함으로써 또다른 정치적 아젠다를 실현시켰다.

한국의 정치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제3당이 도약하려면 영남 호남의 기반을 버린다기보단 잠시 접어두고 새로운 지역을 제패를 해야 나름대로의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 할 수 있다고 본다.

내가 줄기차게 강원도를 주장한 이유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1. 영남을 견제함과 동시에 수도권을 타켓으로 삼아 견제가 가능함 또한 아직 발전가능성이 많은 지역이므로 잠재능력이 있는 지역이 강원도라고 보는것임

2. 또한 문화, 경제수준을 현재 정치에서 실현시키지 못하는것을 새롭게 시도할 수 있으며, 정치적인 새로운 구도와 세력으로 자리 매김을 할 수 있는 정치적인 역량이 있는 지역

만약 이 지역적 기반이 제 3당이 닦질 못한다면 결국에는 이전에 있던 제 3당들처럼 다시금 10년도 못가서 소멸될 수 가 있다.

강원도플랜에대한 구상은 내 머릿속에있지만 성과여부나 노력여하는 이 플랜을 시행하는 당에있다고 본다

나는 이것을 "강원도플랜" 이라고 불렀지만 현대판 "천하삼분지계" 라고도 부른다.

<삼국지 13 역사이벤트 중 - 삼고초려 >


[나는 논한다] 제갈량의 1차북벌의 실패원인은? 나는 논한다

이 글의 내용은 지극히 저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여러분들께 알기쉽게 북벌에대해서 풀어드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 목적입니다. 약간 이해못할 어려운 단어가있더라도 이해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차 북벌의 전략은 성동격서 전략인데 이 전략은 제갈량이 가장 잘 써먹던 중 하나의 전략이였다. (이걸 속은 위군도 멍청함..)

당시 촉군은 34만이라는 대병을 이끌고 출병을했는데 위군은 당시 10만의 방어병력으로 대응을 하였다.

핵심적인것은 "관중"지방의 제패인데 이 관중지방을 제패해야하는 이유는 한 고조 유방이 한신과, 장량, 소하와 함께 서초패왕 항우를 무찌르고 천하를 얻었기때문이다. 그 원동력의 영토가 제갈량의 1차북벌의 핵심지역인 관중지방의 공략 여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이다.


위 지도를 보면 제갈량은 기산을 넘어 천수군 방향으로 가는 당시 전략가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경로로 치고들어가는데 그 이유는
장안성을 공격할 수 있는 최적의 베이스 캠프의 위치가 천수군 평지지역이다. 특히나 "가정" 길목을 막으면 아무리 사마의더라도 쉽게 넘볼 수 없는 길목이기때문에 제갈량의 입장에서는 천수군의 지역을 선택해 전진기지를 확보하고 나아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로로 당황시킬 수 있는 전략적 플랜을 마련한것과 동시에 관중지역의 제패도 동시에 할 수 있었기때문에 그의 입장에서는 천수군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엿을 것이다.

위 지도에서 조운이 배치된 기곡방향이 이 전략의 핵심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데 기곡에서 조운의 별동대가 조진의 군대를 묶어두고 제갈량은 과감하게 친링산맥을 넘어 천수군을 확보하고 가장을 틀어막으면서 장안성을 공략할 수 있는 핵심 필승전략을 마련해서 1차북벌을 진행한 셈이된다.

위나라는 뒤통수를 얻어맞은격이된다. 보통 장안성을 공략하려면 기곡의 통로로 들어가 가장 짧은거리에서 장안성을 공격해야하는것이 병법의 짧은거리에다가 빠른 공격을 할 수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저 길은 위나라가 이미 틀어막고 있는 지역이였고 상대적으로 대병으로 움직이기에는 한계가 있는곳이며 이미 위군도 알고있는 통로라 군대를 주둔시켰으므로 돌아서 가는 전략을 채택해 위나라의 허를 찌른셈이된다.

특히나 조운을 눈속임으로 별동대의 부대를 주고 그 부대가 조진을 붙잡아둔 다음에 제갈량 본인은 본대를 이끌고 진령산맥을 넘어 기산을 타고간 후 천수군을 점령해서 관중지역을 제패하려는 그의 전략은 "신의한수" 였다고 나는 본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실수는 마속을 참군으로 명해 "가정" 지역을 사수 명령을 내렸던것이 치명적인 실수라고 본다.

가정길목만 막앗다면 제갈량의 이 천재적인 전략앞에서 위나라는 속절없이 무너졌고 또한 그토록원하던 장안성을 탈취해 북벌의 기반을 마련하여 관중 지방의 힘을 바탕으로 해서 허창까지 노릴 수 있는 최고의 플랜을 마속이 날려버린것인데

마속은 이와같은 전략을 알았음에도 본인의 공명심과 아집으로 인해 결국 거회를 날려먹은셈이되었다.















[논평] 이유립과 이병도 역사논평

요즘 민족주의적 시각이 높아지면서 "환단고기" 에 대한관심도가 높아졌다.

사실상 환단고기는 "이유립" 이 썻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엉망진창의 내용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내용들도 다수 포함이되어있어 연구에는 참고용 정도로는 가능성이 있는 서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주류학계의 사학도 신뢰하지않는다. 본인들이 해석하고싶은데로 해석을하기때문이다. 예컨데 "이순신 고문설" 이라던가 "선

화공주와 서동왕자의 사랑이야기" 라던가 이러한부분은 어느정도 역사적인 "팩트"가 되어 우리에게 전해져왔다. 또한 "의자왕 혼군설" "원균 졸장부설" 등 여러가지 설들이있다. 이 역사적 인식 자체가 보통적으로 일본인들이 해석해둔 부분에서 시작을 한다.

이병도와 이유립은 이 역사적해석의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인물들이다. 이병도는 주류학계에서 신봉하는 학자로 일본에서 만든 "조선

사 편수회" 에서 활동하던 인물이며 한국의 고대사를 날려(?) 먹은 인물중 한명이기도 한 사람이다.

그 상고사와 고대사를 날려먹은것을 "이유립"이 커버를 했다고 하면서 민족주의 사관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환단고기"를 믿어 버리는 경향이있다.

이병도가 비록 상고사와 고대사를 도륙낸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이유립도 "친일파"라는 논란에는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이병도가 친일행위를 한것은 맞다.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하기도한다. 그러나 이병도가 주창한 "한사군 재 한반도설" 의 학설은 이미 폐

기가 되었으며 이미 주류학계에서도 새로훈 패러다임의 학설이 무더기로 쏟아지고있다.

그러나 이유립을 좋아하고 "환단고기"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병도의 조선사편수회 촉탁사원으로 일제에 협력했으니 친일파다라고 한다.

맞다 이병도는 이마시니 류(금서룡), 쓰다 쏘키치, 이병도, 쓰에마스 야스카즈(임나일본부설 최초 주창자) 이렇게 상고사와 고대사를 도륙낸 사람들이다.

환단고기 신봉하는 사람들이나 주류학계의 이병도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나... 그 나물에 그밥이고...

서로간의 밥그릇싸움으로 밖에 보이지않기때문에 나는 중립적 역사학에 대한 노선을 타고있는 중이다. [ 조선상고사 신뢰파.. ]

오늘은 시간이 많지 않으므로... 글을 여기까지만 적겠다..

두서없이 쓴 글이므로 너무 뭐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논한다] 정치판의 천하삼분지계1편 나는 논한다

나는 일전부터 이런 천하삼분지계를 논해왔다. 다당제가 확립이되려면 우리나라의 정치적인 구도상 한쪽지역의 기반이 없이는 다당제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기때문이다. 현대판 "천하삼분지계"는 인물도 인물이어야하지만 지역적인 기반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무런 정치를 할 수 없는 특성이 대한민국에는 존재하기때문이다.

유비는 제갈량을 만났을때 서촉54군과 형주9군의 지도를 보았고 그를 영입하여 익주지역을 손에넣고 황제가 되었다.

친링산맥을 기반으로 수성전에도 능할 수 있는곳이기도 하며 친링산맥을 넘어가면 비옥한토지와 문화적이 융성했던곳이기에

유비는 이 지역을 근간으로 "촉한(蜀韓)" 이라는 나라를 세워 천하를 삼분하였다.

지금현재 "익주"와 같은곳은 어디일까? 질문을 많이받는다 혹자는 "충청도"라고 하지만 충청도는 지리적으로 보게되면 "형주"와 가깝다고 볼 수 잇는 곳이다. 실제 교통의 요충지와 사통팔달이 발전된지역이 충청지역인것을 감안하면 "형주"라는 이야기는 어불 성설도 아니게된다.

나는 현대판의 "익주" 즉 유비가 황제가되었던 지역은 바로 "강원도" 라고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같다.

1. 인구가 150만 이상이라는점과 아직 발전성이 무궁무진하다는점
2. 어업인 인구가 많아 어업인 인구로 충분히 민심잡기가 가능하다는점
3. 결정적으로 군부대가 많기때문에 군부대와 문화유적지를 묶어서 발전을 시키면 경제적이 부가가치가 늘어난다는점
4. 영남지역 및 서울,경기 지역과도 붙어있는 곳이기때문에 쉽게 수도권지역으로 진출 할 수 있다는점

첫번째는 "강원도" 출신의 인물을 내세워서 2년을 준비해야한다. 어업인 인구를 기반으로 민심을 잡고 그 지역에 국회의원이나 지방자치단체 장을 선출하여 민심잡기에 주력하여 내실을 다진다.

두번째는 어업인구를 주장하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어업인구가 소외를 받아왔기때문이다. 어업인구가 소외받은만큼 정치권에서 어업인구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준다면 당연 어업인들은 당을 지지할것이고 그 당이 핵심적인 다크호스로 급부상할것이다.


세번째 위 지도에서 보는것과 같이 철원부터 삼척까지의 역사벨트를 조성하여 강원도를 역사문화 특구지역으로 만들어 발전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네번째 경기도, 충북, 경북 세 지역을 동시견제가 가능해진다. 이 지역들을 견제를하면서 지지율을 올리고 충청도를 제패하게되면 제 3당의로써의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어민에대한 정책 및 대안은 내 머릿속에 있으므로 쉽사리 공개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개인적인 연락으로 믿을 만한사람이라면 언제든지 어민에대한 정책 및 대안을 줄 수 있다.

특히나 바른미래당 같은 경우 합당한지 얼마안되었으므로... 사실상 바른미래당이 강원도지역을 제패를한다면 제3당으로써의 입지나 세력이 더 커질 수 도 있기에 영,호남에만 집착은 하지않았으면하는 바램이다.

일종에 강원도도 소외를 받아왔기때문에 지역적인 특성상 강원도를 제패하는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어민권익증진] 어민은 현재 정치적으로 소외받고있다! 어민권익증진

어민은 항상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하고 소외받고있다.

혹자는 어민들이 "가방끈"이 짧다는 이유만으로 무시를 한다고한다.

그러나 어민들은 대한민국의 어업을 지탱해오며 살아온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어민들이 왜 소외를 받고 무시를 당해야하는가?

수산자원관리법에 묶여 2중이상 자망을 사용하는 어민을 전부 불법어민으로 낙인찍혀 나라에서 범죄자로 만들어 살아간다.

더군다나 어망에대한 정부에대한 "보조"금액도 없다.

"수협"의 어민복지정책도 사실상 "유명무실"하다고 보는사람중 한명이다. 어가인구가 점점 감소하고, 어획량도 감소하고있는 상황에서 어촌계에 직접적인 위기가 오고있다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어민들은 지금까지 소외를 받아왔다.

특히 내가사는 지역만해도 어민들 전부해봤자 20명이 조금넘을뿐이다. 나이드신분들이 많기도하고 어촌에 살기싫어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자녀들의 교육을위해서 어업을 포기하고 도시로 나가는 어민들이 대다수이다.

농민보다 어민들은 인구수가 적고 또한 배를 한척 가지고있다는 이유만으로 "소외"를 받고, 어망때문에 불법어민으로 낙인찍혀 우리 어민들을 지켜줘야하는 "해양경찰"에게 쫓기면서 하루를 힘들게 버티면서 살아가는 어민들도 많다.

나는 어민들의 권익과 청년어민육성계획을 만들어서 반드시 어촌계에도 활기가 넘치고 위기의 어촌계를 꼭 다시 살려서

내가 만들고자하는 "어민권익위원회"가 어민들의 삶과 이익창출에 기여를 하고싶다.

어민정책은 내가 현재 만들고는 있지만 사실상 들어줄 사람도, 같이 느껴줄 사람도 없다.

어민들의 아우성도 들어주었으면한다.



<어민권익위원회 위원장 이지환>


[나는 논한다] 바른미래당의 천하삼분지계 - 특별편 나는 논한다

이 글은 바른미래당 여성당원이신 "김정혜" 님께서 요청하신 글로 특별히 쓰게된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를 인용한 "한국판" 천하삼분지계 >

한국에서 다당제가 확립이 되지않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양대 정당에서 나와 이합집산을 하여 뜻 맞는사람들끼리 오히려 세력을 구축하는 당을 만들었기때문에 다당제의 확립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했다.

대구 경북지역은 이미 자한당이 쥐고있으니 지역적으로 타켓을 삼고 들어가기도 힘들고, 또한 호남지방도 민주당의 본산으로써 잘 사수하면서 만들어가고 있으므로 양대 지역을 중심으로 다당제를 구현한다는것 자체가 굉장히 힘이들다

여기서 중점으로 두어야할곳은 양대 정당이 차지하지 못한 지역을 차지하는것이다.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 형주를 손에 넣고 그 것을 기반으로 익주를 손에 넣어 천하의 한쪽인 "사천" 지방을 중심으로 황제로 등극했고 삼국을 형성하였는데

바른미래당이 앞으로 나가려면 TK지역과, 호남지역을 사수함과 동시에 바른미래당이 다른 지역을 찾아 근거지로 삼아야하는것이다.

예를들어 강원도나, 충청도 같은경우는 어떤 명확한 정당들이 있는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한쪽편만 드는것도 아니다.

이 두지역중 한곳을 제패하면 다당제를 확립할 수 있는 지역적 기반은 마련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다음 인재를 육성해야하는데

인재를 육성함에 잇어서 정치인을 꿈꾸는 사람을 육성하는것이 아닌 "정치인을 만들어가는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

즉 "책사" 들을 육성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전문인력을 바탕으로 공부시키고 훈련시키면서 정치인과 함께 연대를 해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갈 비전제시를 해준다면

초선 의원같은경우도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될것이며, 또한 재선을 목표로 두는 정치인들도 굉장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나머지는 궁금하면 댓글달면 답변드리도록하겟다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현대판 역사논평

지난번 선거때는 자신들이 이권을 챙기기위해서 찍어달라고 급급했고 어리석은 우리 경북민들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지지하는 정치인이면 도민의 기치의 깃발을 들고 이권을 챙기지 아니하고 박정희대통령의 유지를 이어 받아 경북도민의 삶을 영유할것이니라 " 하여 작은도시 포항에서 대구까지 경북도민이 환영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270만꿈밖에 어찌하여 거짓말이 난무하는 선거판이 되었는가, 이 선거판은 비단 우리 경북도민 뿐만 아니라 한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정치인들의 본뜻이 어디에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정치인들의 지지자들이 한쪽만 보고 곧잘 거절하지못하였으니 선거에는 무조건 깃발만 꽂으면 되는  것인줄 정치인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 만도 못한 소위 "정치인"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ㅇ이ㅣㄱ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떨며 나라를 혼란에 빠드리는 일을 감수했던것이다.

아! 5천만년의 강토와 경북도의 안위와 안녕을 들어바치고 270만 생령들로 하여금 정치인의 하수인이 되게하였으니,. 저 개돼지 보다 못한 정치인들과 각 위선지지자들이야 말로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정치인이란 자는 서민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라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남들처럼 통곡하며 바른소리도 못했고, 나 자신처럼 소신없는 행동으로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대단한 경북도민들을 뵈올것이며 그 무슨면목으로 270만의 도민들과 얼굴을 맞댈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70만 경북도민이여! 아무 정치인이나 막찍어 주지말자! 우리는 생각이 없는건가 있는건가? 단군과 기자 이래 5천만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도민이여! 도민이여!




[전쟁사] 제2차 고수전쟁의 서막 전쟁사

[ 경과 요약 ]

 

 

< 서막 >

 

611년 영양왕(?陽王) 22년 봄 2월 수제(隋帝)는 조서를 내려 토벌키로 하였다. 여름 4월 거가가 탁군(註 북경 남쪽)의 임삭궁에 당도하여 사방의 군사들이 탁군으로 모였다.

 

612년 영양왕(?陽王) 23년(A.D 612년) 봄 정월 수 양제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하찮은 고구려 무리들이 어리석고 불공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들고, 요(遼)와 예(濊)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비록 한(漢), 위(魏) 때 주륙을 거듭 당하여 그들의 소굴이 잠시 엎어졌어도, 난리로 막힘이 많자 무리들이 다시 모여들어 지금은 지난 시대보다 더 많아졌다. 돌아보니 중국의 땅이 잘리어 오랑캐 땅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악이 쌓이고 가득차니, 하늘의 도는 음란한 자에게 재앙을 내리므로, 이미 망할 징조다. 도를 어지럽히고 덕을 무너뜨림이 헤아릴 수 없고, 악을 가리고 간사함을 품은 것이 하루를 세어도 다 헤아릴수 없을 정도다. 일찍이 조서를 내려보내 고하여도 조칙을 받아들인 적이 없고, 조근도 몸소 하지 않았다. 도망간 자들을 받아들임이 그치지 않고, 변방의 봉화자를 수고롭게 하며, 관문과 딱다기가 조용할 날이 없으니, 그로 인하여 백성들은 생업을 폐하게 되었다. 옛날에 정벌하면서 하늘의 그물에서 빼주어, 사로잡힌 자의 죽음을 늦추어주고, 후에 항복한 자도 죽이지 않았는데, 그 은혜를 생각지 않고 도리어 악을 쌓아, 거란 무리를 합쳐 바다의 수자리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습관을 익혀 요서를 침범하였다. 또 청구의 바깥에서 모두 직공을 닦고, 함께 정삭을 받드는데, 다시 왕래하는 길을 막아 보물을 빼앗고, 죄없는 사람들에게 잔학한 짓을 하였으니, 정성을 바치려는 사람들이 도리어 화를 당하였다. 수레를 탄 사신이 해동에 이르러, 번국의 경계를 지나려 해도 길을 막고 사신을 거절하여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떻게 신하의 예라고 할 수 있느냐? 이를 참는다면 무엇인들 용서 못하랴? 또 법령이 가혹하고 조세가 무거우며, 힘센 신하와 호족들이 국정을 틀어쥐고 붕당을 이루고, 뇌물을 주고받음이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과 같으니, 백성들의 억울함이 풀어지지 않는다. 해마다 거듭된 재앙과 흉년으로 기근이 들고, 병사들은 토벌로 쉬지 못하며, 부역의 기한이 없고, 군량 운반으로 힘이 다하여, 몸뚱아리는 구덩이나 골짜기에 구른다. 고통스러운 백성들은 누구를 따를 것인가? 경내의 백성들이 그 폐해를 견디지 못하여 슬프고 두려워도. 생명을 도모하기 위하여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돌리니, 노인과 어린이도 혹독함에 탄식한다. 나는 풍속을 살피려 유주, 삭주에 왔는데, 조문하고 죄를 묻는 것을 두 번 걸음할 수 없어,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구벌을 펴서, 위급한 자를 구해주며, 하늘의 뜻에 따라 달아난 무리를 멸하여 선조의 가르침을 이을 것이다. 이제 마땅히 군율에 따라 행군하되 대오를 나누어 목적지로 향할 것이니, 우레같은 진군소리는 발해를 뒤덮게 하고, 부여를 지나 번개같이 휩쓸 것이다.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갑옷을 살피고, 군사들에게 경계하여 일러둔 후에 출행하며, 거듭 알리고 타일러서 필승을 기한 후에 싸우라" 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월부터 수 양제는 직접 정벌군을 발진시켰다. 왼쪽 12군은 누방, 장잠, 해명, 개마, 건안, 남소, 요동,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 등 길로 진군하고, 오른쪽 12군은 점선, 함자, 혼미, 임둔, 후성, 제해, 답돈, 숙신, 갈석, 동이, 대방, 양평 등 길로 진군하되 앞뒤 부대끼리 서로 연락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여 모두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모두 1,133,800명이었는데 200만 명이라고 일컬었다. 군량을 나르는 자는 그 배가 되었다. 남쪽의 상건수 위에서 제사를 지내고, 임삭궁 남쪽에서 상제에 제사지내고, 계성 북쪽에서 마조에 제사지냈다. 제가 친히 절도를 제수하여 군대마다 상장과 아장을 각각 1명씩 두고, 기병은 40대로 하고, 각 대는 100명, 10대가 1단이 되게 하였으며, 보병은 80대로 하고 나누어 4단으로 하였으며, 단마다 각각 편장 1명을 두었다. 그 갑옷, 투구, 갓끈, 인장끈, 깃발은 단마다 색깔을 다르게 하였다. 하루 1군씩 40리 간격으로 영(營)을 이어 점진케 하니 40일만에 출발이 모두 끝났다. 머리와 꼬리가 계속되고 고각이 서로 들리며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 어영 내에는 모두 12위, 3대, 5성, 9시가 있었는데, 내 외 전 후 좌 우 6군에 나누어 속하게 하고 그 뒤에 출발시키니 또 80리를 뻗쳤다.

 

주석

 

좌군 12군 우군 12군 중군 6군을 포함해 도합 113만 3800명으로 출병 <수서>

탁군으로 출병한 이유는 영양태왕에게 1만의 병력으로 선제공격을 받아서 전진기지를 후퇴시켰음.<임용한>

 


< 요하전투 >

 

612년 3월15일, 수 양제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며 수나라의 대군은 요하에 이르렀고 수나라 대군이 모두 모여 물가에 이르러 큰 진을 이루었으나, 동쪽으로 진군(進軍)하는 수(隋) 나라 군사와 이를 방어하는 고구려 군사간에 첫 전투가 벌어졌고, 이곳에서 수(隋) 나라 군사와 고구려 군사간에 2달 동안에 걸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고구려 군사가 강을 막고 지켰으므로 수나라 군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수 양제가 공부상서 우문개에게 명하여 요하 서쪽 언덕에서 3개의 부교를 만들게 하였는데, 완성되자 끌어다 동쪽 언덕으로 갔으나 짧아서 한 길 남짓하게 언덕에 미치지 못하였다.

매번 고구려 군사들이 크게 닥치자 수나라 군사로서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다투어 물가로 나아와 접전하였다. 고구려군 약 2만여명이 높은 곳에 올라 공격하니, 수나라 군사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기록상 약 3만여명이 사살되었다. 무술일(3월 19일), 수(隋)나라 군은 총공격을 하여 도하에 나섰으나 고구려군의 대반격에 크게 패하여 맥철장(麥鐵杖), 전사웅(錢士雄), 맹차(孟叉) 등 용맹한 장수들이 죽었다. 이에 군사를 거두어 다리를 끌고 서쪽 언덕으로 돌아갔다.

수 양제는 크게 분노하여 다시 소부감 하조에게 명하여 다리를 잇게 하여 이틀만에 완성하였고, 이에 수나라 대군이 일제히 차례로 이어서 나아가 동쪽 언덕에서 크게 격전을 치뤘고, 이에 고구려 군사들이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만명을 헤아렸다.

마침내 처음 요하에 도학한지 2달만에, 5월16일, 수나라 대군은 요하를 건너는데 성공하였다. 허나 이과정에 수양제는 도하에 성공한 우군 11군으로 하여금 요동성을 포위하게 하였고 좌군 10군으로 하여금 요동 각 성을 포위케 했다. 성들간의 지원을 끊기 위함이었다. 허나 수개월 간 요동 20여성 중 한곳도 함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내호아가 이끄는 2군 12만의 1000여척의 함대로 하여금 수군기지 비사성(요동반도 끝. 백제 관미성)이 아닌 평양을 직공케 했다.

요하를 건넜으나 다시 고구려군이 몰려와 요하 동안(東岸)에서 고구려 군사와 큰 전투를 치른 후 수제가 요수에 이르자 조서를 내려 천하에 사면을 베풀고, 형부상서 위문승 등에게 명하여 요수 동쪽의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고, 10년 동안 조세를 면제해주고 군현을 두어 서로 통섭하게 하였다,

 

주석

 

요하에서 고구려 요격군에게 대패해서 전세가 밀렸으나 인해전술로 밀어붙여서 요하를 도강

고구려 요격군 피해는 1만~2만으로 추산하고있으나 실제로는 1만이라고 보는거 정설임

 

 

< 요동성 전투 >

 

5월 16일 수나라 군사들은 고구려 군사의 저항을 뚫고 요수를 건너 그날 요동성(遼東城)을 포위하였다. 요동성은 한나라 때의 양평성이다. 평지성이며 고구려 역대 성 가운데 5손가락 안에 드는 대성이었다.

여름 5월 초 요동성 군사가 자주 나와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수제는 모든 군사에게 명령하여 공격케 하였다. 요동성이 함락되려 하자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이 외치며 항복하기를 청하였으나 처음 여러 장수가 동으로 내려올 때 수제가 이르기를 "군사행동은 모두 아뢰고서 행하여라" 하였으므로 여러 장수가 그 칙지를 받들어 감히 응해 가지를 못하고 먼저 달려가 아뢰었다. 그에 대한 회보가 왔을 때에는 성 중의 방어 또한 갖추어져 항거하며 싸웠다. 이 같이 하기를 두세 차례 거듭하였으나 수제는 끝내 깨닫지 못하였고, 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6월 수제가 요동성 남쪽에 행차하여 그 성지와 형세를 관찰한 뒤 여러 장수를 불러 꾸짖으며, "그대들이 힘을 다하지 아니해도 내가 그대들을 죽이지 못할 줄로 여기느냐" 하였다. 여러 장수가 다 벌벌 떨며 낯빛이 변하였다. 수제는 성 서쪽 수리에 머물러 육합성에 어거하였다.

수제(隋帝)는 요수 전투에서 수나라 군사들이 대량으로 전사함으로써 종대대형(縱隊隊形)으로 진군이 어렵자 후군로(後軍路)와 보급로(補給路)가 차단(遮斷)당하지 않기 위하여 수제(隋帝)가 거느린 어영군은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하고 좌로군 11군 장수에게는 진군로 주변 요지(要地)에 있는 고구려 성을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때부터 12군은 진군로 주변 요지에 있는 고구려 성 공격에 나섰다. 허나 수개월 간 요동의 20여 성 중 단 한곳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 수군 3개 군이 몰살당하였다.

 

주석

 

수나라 군대는 요동성을 공격하는시간만 6개월을 허비하였다. < 수서 >

수나라는 요동성을 공격하기 위해서 육합성을 쌓고 장기전에 돌입했으나 수성전에 강한 고구려군대에게 패전을 거듭

요동성 하나를 넘지 못하자 별동대를 조직해서 평양성을 곧바로 공격하게 하였음 < 우중문 우문술 >

 

 

< 평양성 전투 >

 

우리 여러 성이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아니하니 좌익위대장군 내호아와 주법상이 강회의 수군(2도행군 12만 병력. 함대 1000여척)을 거느리고 수백 리에 뻗쳐 병선으로 바다를 떠서 먼저 4만여 병력이 패수로부터 들어와 평양과 60리 거리의 지점에서 우리 군사와 만나 진격하여 크게 부쉈다. 호아가 승세를 타서 그 성을 육박하려 하자 부총관 주법상이 말리며 제군의 도착을 기다려 함께 진격하자고 청하였다. 호아는 듣지 아니라고 정병 4만명을 뽑아 곧장 성 밑으로 달려들었다. 우리 장수는 나곽 안의 빈 절 속에 복병해 놓고 군사를 내어 호아와 더불어 싸우다가 거짓 패하였다. 호아가 쫓아서 성 안에 들어와 군사를 풀어 사람을 사로잡고 물건을 약탈하느라 대오가 흩어지게 되자 복병이 터져 나오니 호아는 크게 패하여 겨우 몸만 빠져나가고 살아 남은 군사는 수천명에 불과하였다. 이때 고구려 지휘장수는 왕제 건무(훗날 영류왕)로 추정되고 평양성의 수비군은 3만여명으로 추정된다. 이 중 대부분이 을지문덕을 따라간것으로 보이고 그 기록에 따르면 건무를 따랐던 군사는 500명 남짓으로 보인다. 허나 4만의 병력을 몰살시킨것으로 미루어보아, 2만~4만여명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수군도 대부분 상륙하여 전투에 투입된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군사는 병선이 있는 곳까지 쫓아갔으나 주법상이 진영을 단속하고 있으므로 물러났다. 호아는 군사를 끌고 돌아가 해포에 주둔하고 감히 다시 제군을 응접하지 못하였다.

 

주석

 

삼국사기 기록으로 보아 고건무는 이 전투로 인해서 이후 왕위에 즉위한다 < 영류왕 >

내호아가 수군 4만으로 고구려 평양성을 먼저 공격하였으나, 고건무의 내성매복전략으로 전멸당함 < 수서 >

수군의 전멸로 인해 30만 별동대의 식량수급이 원활하지 못했고 이후 "살수대첩"에서 패배 < 필자생각 >

 

 

 

< 살수대첩 >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에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에서 나오고, 좌효위대장군 형원항은 요동도에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설세웅은 옥저도에서 나오고, 우둔위장군 신세웅은 현도도에서 나오고, 우어위장군 장근은 양평도에서 나오고, 우무후장군 조효재는 갈석도에서 나오고, 탁군태수 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은 수성도에서 나오고, 검교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은 증지도에서 나와 모두 압록수의 서쪽에 모였다. 우문술 등의 군사는 노하, 회원 2진에서부터 사람과 말에게 모두 100일분의 군량을 주고, 또 갑옷, 무기와 아울러 의자, 융구, 화막을 나누어 주니, 사람마다 3석 이상이 되어 무거워 능히 운반할 수 없었다. 군중에 명령을 내려 “군량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하였으므로, 사졸들이 모두 군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행군이 겨우 중로에 이르자 양식이 이미 떨어지게 되었다.

왕은 대신 을지문덕을 시켜 그 진영에 나아가 거짓 항복케 하니 이것은 실상 그의 허실을 관찰하려 함이었는데 우중문이 먼저 받은 수제의 밀서에 "만약 왕이나 문덕이 오는 기회가 있거던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하였으므로 문덕을 잡으려 하던 차 위무사 상서우승 유사룡이 굳이 말리어 중문은 못내 그 청을 들어 주었다. 문덕이 돌아가자 이내 후회하고 사람을 시켜 문덕을 속이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다시 오라" 하였으나 문덕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압록수를 건너가 버리니 우중문, 우문술 등은 문덕을 놓치고 마음이 편하지 못하였다. 우문술은 군량이 다 되어 가므로 돌아가려 했으나 우중문의 의견은 "정병으로써 문덕을 추격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문술이 굳이 말리니 우중문은 노하여 "장군이 10만의 병력을 가지고서 능히 소적을 깨뜨리지 못한다면 무쓴 낯으로 제를 뵙겠소 나도 이 걸음이 반드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옛날의 명장이 능히 성공한 것은 결정권이 한사람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소 이렇듯 사람마다 각 마음을 갖고 있으니 어떻게 적을 이긴다 말이요" 하였다. 그때 수제가 우중문이 계획성이 있다 하여 제군으로 하여금 절도를 품해서 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우문술 등은 하는 수 없이 응종하여 여러 장수와 더불어 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문덕은 우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지치게 하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달아나기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우문술 등은 하루 사이에 일곱 번 싸워 다 승리하였다. 이미 손쉽게 승리한 것을 믿고 또 뭇 사람의 의논에 밀려 급기야 동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평양성과 30리 거리에서 산을 의거하여 진영을 만들었다.

을지문덕은 이때 우중문에게 사자를 보내 시를 한 편 보냈는데, 이 시가 바로 "여수장우중문시"이다. 또한 우문술에게도 사자를 보내어 영양왕이 황제에게 항복을 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우문술은 우중문을 설득하여 요동으로 퇴각할 것을 지시했다. 문덕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거짓 항복서를 올리고 우문술에게 청하기를 "만약 군사를 철회한다면 마땅히 왕을 모시고 행재소에 가서 조회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문술은 자기의 병졸이 지쳐서 다시 싸울 수 없음을 보았고 또 평양성이 험하고 굳어 졸지에 함락시키기 어려울 것으로 짐작하여 마침내 거짓 항복을 구실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방진을 만들어 행군하자 문덕이 사방으로 유격해 우문술 등은 싸우다 가고 가다 싸웠다.

가을 7월 살수에 도착하여 군이 반쯤 건넜을 무렵 우리 군사가 뒤로부터 그 후군을 공격하니 신세웅이 전사하였다. 을지문덕은 퇴각하는 수나라 군에게 공격할 것을 명했다. 결국 수나라 군은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으로 추정, 淸川江)에서 물을 만나 퇴각 속도가 더디게 되었다. 고구려 군은 이를 노려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무너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남은 병사가 달아나 압록수에 당도하고 보니 하루 낮 하루 밤에 4백 50리를 걸은 폭이었다. 처음 9군이 요에 도착할 때는 무려 30만 5천명이었는데, 요동성에 되돌아 왔을 때는 겨우 2천 7백 명뿐이었고 수만으로 계산되는 기계와 물자도 거의 다 탕진되었다.

수제는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에 묶어 가지고 돌아갔다. 수나라 군대가 요수를 건너자, 백제도 역시 국경에 군사를 엄히 배치하고 말로는 수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 실은 양다리를 걸치었다. 수나라는 이번 군사행동으로 오직 요수의 서쪽에 우리의 무려라를 함락시켜 요동군과 통정진을 설치하였을 따름이었다.

수 나라 개황 연간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자, 좌익위 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익위 대장군 우 중문은 낙랑도로 나와서 9군과 함께 압록강에 이르렀다. 문덕이 왕의 명을 받들고 적진으로 가서 항복하는 체하였으나, 이는 사실 그들의 허실을 보려는 것이었다. 술과 중문은 이 보다 앞서 황제의 비밀 교지를 받았었다. 이에는 고구려의 왕이나 문덕을 만나거든 체포하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따라 중문 등은 문덕을 억류하려 하였는데, 위무사로 있던 상서 우승 유 사룡이 굳이 말리는 바람에 결국 문덕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뒤에 이를 깊이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 문덕을 속여서 말하기를 "재차 의논할 일이 있으니 다시 오라"고 하였으나, 문덕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압록강을 건너왔다. 술과 중문은 문덕을 놓친 뒤에 마음 속으로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술은 군량이 떨어졌다 하여 돌아가려 하는데, 중문은 정예부대로 문덕을 추격하면 공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술이 이를 말렸다. 중문이 화를 내어 말했다. "장군이 10만의 병력을 가지고 와서 조그마한 적을 격파하지 못하고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뵈옵겠는가?" 술 등은 마지못하여 그 말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서 문덕을 추격하였다. 문덕은 수군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피로하게 하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매번 패배한 척하며 도주하였다. 이렇게 하여 술은 하룻 동안에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승리에 뱃심이 생기기도 하고, 또한 중의에 몰리기도 하여,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밖에서 산을 등지고 진을 쳤다.

을지문덕우중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보냈다. "그대의 신기한 계책은 천문에 통달했고, 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를 알았도다. 전투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한 줄 알았으면 돌아가는 것이 어떠하리." 우중문이 답서를 보내 효유하였다. 을지문덕이 또한 사자를 보내 항복을 가장하고 술에게 요청하였다. "만일 군사를 철수한다면 틀림없이 왕을 모시고 행재소로 가서 조견하겠다." 우문술은 군사들이 피곤하고 기운이 쇠진하여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갑자기 함락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여, 거짓 항복이라도 받은 상태에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방어진을 만들며 행군하였다. 문덕이 군사를 출동시켜 사면으로 공격하니 술 등이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는 쫓겨 갔다. 그들이 살수에 이르러 군사가 절반쯤 강을 건너 갔을 때, 문덕이 군사를 몰아 그들의 후군을 맹공하여 우둔위장군 신 세웅을 죽였다. 이렇게 되자 모든 적군이 한꺼번에 허물어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9군 장졸이 달려서 패주하였는데, 하루낮 하루밤 사이에 압록강에 이르니 그들은 4백 50리를 간 셈이다. 처음 압수를 건너 올 때 그들은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에 돌아갔을 때는 다만 2천7백 명뿐이었다.
 

주석

 

우둔위 대장군 신세웅이 전사, 전쟁사에서 사령관급 지휘관의 죽은 예는 한국전쟁사에서 고수전쟁이 처음 < 수서 >

신세웅의 부장인 맥철장도 전사, 고구려군대의 사면포위전술 및 사면강공전술로 수나라군 궤멸 < 필자생각 >

고건무의 내성매복전략으로 인해 수군이 무력화되자 별동대는 지쳐서 전투수행능력이 떨어짐

살수대첩에서 "수공" 전술은 전적으로 "조선상고사"의 주장, "수서"에서는 없는기록임

살수가 실제로 대군이 넘을 수 있는 큰 강이 아니므로 각개격파를 했을 가능성이 큼 < 필자생각 >

 


< 결과 >

 

평양을 직공하는 육군 별동대와 해군 상륙군이 모두 패퇴하고, 수 본국에는 반란이 일어나자 수양제는 어쩔수없이 퇴각하고 만다.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고구려측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것으로 추정된다. 청야전술로 인해 요동벌부터 평양 깊숙히까지 모든 논밭이 불탔다. 인명피해만 보더라도 적지 않았다. 요동벌에서만 1만의 군사가 죽었고, 요동성 공방전 중에도 적어도 2~3만의 고구려군이 전사했을것으로 보인다. 수나라 군사들은 요동의 각 성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기에 각 성의 피해상황까지 합친다면 역시 수만명을 헤아릴것이다. 수나라측에 얻은게 없이 돌아갔기에 고구려의 승리였다. 수나라에게는 멸망의 결정적인 영향을 줄 정도로 타격을 입힌 전쟁이었다.


[역사탐사보도] 51종20만권의 책을 찾아낸 문정창은 친일파 역사 탐사보도

환단고기를 신봉하는 소위 " 환빠 " 들이 가장 잘 우려먹는(?) 논지중 하나는 일제가 51종 20만권의 책을 수거해서 태워버렸다. 라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에대해서 나는 반박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있다.

 

첫번째로 51종 20만권의 책중 역사책은 없고 교과서, 민담집, 설화집 등 이야기 책들만이 수두룩하다.

두번째는 문정창이라는 사람은 일제에서 녹을 먹던사람이다. 이사람은 2009년 민문연에서 발행한 친일파 인명사전에도 등록된 사람중 한명이다.

 

1. 51종 20만권의 책 목록

 

01. 初等大韓歷史 (초등 대한역사) / 정인호 편집 장세기 교열 / 1908년 발간 / 단군에서 조선까지 간략하게 기술한 개설서. 배일, 애국사상 고취

02. 普通敎科東國歷史 (보통교과 동국역사) / 현채(玄采) 지음 / 대한제국 학부에서 1899년에 펴낸 중학교 교과서로 8권 3책으로 되어있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부터 기술하고 있다.

03. 新訂東國歷史 (신정 동국역사) / 유근(柳瑾:1861∼1921) & 원영의(元泳義) 1906년에 지은 역사책

04. 大東歷史略 (대동역사략) /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1907년 흥사단에 병합됨) / 대한제국의 교과서. 1906년 간행. 7권 1책. / 단군조선, 기자조선, 마한, 신라 등의 역사를 소략하게 기술.

05. 大韓新地誌 (대한신지지) / 장지연(시일야방성대곡의 그 장지연) / 1906년 지리교과서로 만듦 / 우리나라의 자연지리와 풍속, 물산 등 인문지리를 다룸

06. 大韓地誌 (대한지지) / 현채(玄采) / 1899년 교과서로 편찬 / 총론과 13도편으로 대한전도와 각도의 지도를 붙인 뒤 각 지역을 설명함

07. 最新高等大韓地誌 (최신 고등 대한지지) / 정인호(鄭寅琥) / 1909년 교과서로 편 /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하고 있음

08. 問答大韓新地誌 (문답 대한신지지) / 노익형(박문서관 주인, 국채보상운동 등을 한 사)

09. 最新初等大韓地誌 (최신 대한 초등지지) / 정인호

10. 最新初等小學 (최신 초등소학) / 정인호

11. 高等小學讀本 (고등 소학독본) / 장지연

12. 국문과본 / 원영의

13. 初等小學 (초등 소학) /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 / 1906년 교과서로 편찬

14. 國民小學讀本 (국민 소학독본) / 대한제국 학부에서 1895년 교과서로 편찬 / 자연현상과 이치, 세계
주요 도시 문명화 파악, 중상주의 등 기술

15. 小學漢文讀本 (소학 한문독본) / 원영의

16. 녀자독본 (자는 아래아) / 장지연 / 1908년 / 여성용 교과서

17. 婦幼讀習 (부유독습-조선총독부 관보에는 婦女讀習이라고 잘못 나와있다) / 강화석(姜華錫) / 1908년 교과서로 편찬

18. 高等小學修身書 (고등 소학 수신서) / 휘문의숙 편집부 / 1907년 교과서로 편찬

19. 初等倫理學敎科書 (초등 윤리학 교과서) / 안종화(安鍾和) / 1907년 교과서로 편찬

20. 中等修身敎科書 (중등 수신 교과서) / 휘문의숙편집부 / 1908년 교과서로 편찬

21. 初等小學修身書 (초등 소학 수신서) / 유근(柳瑾:언론인)

22. 獨習日語正則 (독습 일어 정칙) / 정운하(鄭雲复:독립운동가) / 1907년

23. 精選日語大海 (정선 일어 대해) / 박중화(朴重華:교육가, 보성중학교 교장) / 1909년

24. 實地應用作文法 (실지 응용 작문법) / 최재학(崔在學:평양 유생, 애국지사) / 1909년

25. 飮氷室文集 (음빙실문집) / 양계초(청나라 사상가)

26. 國家思想學 (국가사상학) / 정인호(鄭寅琥:최초 발명특허권자, 최초 저작권 분쟁을 일으킨 사람이기도 하다)

27. 民族競爭論 (민족경쟁론) / 양계초(청나라 사상가) 지음 유호식(劉鎬植) 번역

28. 國家學綱領 (국가학강령) / Johannes Bluntschli(독일)의 학설을 안종화(安鍾和)가 번역 / 1907년

29. 飮氷室自由書 (음빙실자유서) / 양계초(청나라 사상가)

30. 準備時代 (준비시대) / 천도교 중앙총부 / 1905년 / 천도교 해설서

31. 國民須知 (국민수지) / 김우식(金宇植) / 1906년 / 대한제국 시절 가장 널리 퍼진 국민계몽서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2. 國民自由進步論 (국민자유진보론) / 유호식(劉鎬植) 번역

33. 世界三怪物 (세계삼괴물) / 斯密哥德文 지음 변영만(수주 변영로의 형) 번역 / 1908년

34. 二十世紀大慘劇帝國主義 (20세기 대참극 제국주의) / 변영만 / 1908년

35. 强者의 權利競爭 (강자의 권리경쟁) / 유문상(劉文相:국채보상운동의 주역) 번역 / 일본책 『強者の権利の競争(1893)』을 번역한 것인데 이 책은 진화론을 통해 천부인권설, 이상주의 관념존 종교적 세계관 등을 소개하고 있음

36. 大家論集 (대가론집) / 유문상(劉文相) 번역

37. 靑年立志編 (청년입지편) / 유문상(劉文相) 번역

38. 男女平權論 (남녀평권론) / 최학조(崔鶴詔) / 1908년 / 남녀평등 사상을 다룬 책

39. 片片奇談警世歌 (편편기담 경세가) / 홍종온(洪鍾穩) /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아전에게 골탕먹는 지방 수령 이야기 등등이 들어있었다.

40. 쇼아교육 (아의 ㅏ는 아래아) / 임경재(林景宰 : 휘문고 교장, 조선어학회 창설멤버)

41. 愛國精神 (애국정신) / 이채병(李採丙) / 아래 책의 한문본.

42. 애국졍신담 (애의 ㅏ는 아래아) / 이채병(李採丙) / 1908년 / 애국단체 서우학회(西友學會)의 기관지 서우(西友 : 1906.12-1908.1 박은식이 주필이었)에 연재되었던 글모음

43. 夢見諸葛亮 (몽견제갈량) / 유원표(劉元杓 : 해직군인) / 1908년 / 꿈에 제갈량을 만났다는 뜻으로 사회비판과 계몽주의를 논하고 있다.

44. 乙支文德 (을지문덕-漢文) / 신채호 / 1908년

45. 을지문덕 (국문) / 신채호 / 1908년

46. 伊太利建國三傑傳 (이태리 건국 삼걸전) / 양계초 지음 신채호 번역 / 1902 / 이탈리아 건국의 세 주역에 대한 이야기

47. 噶蘇士傳 (갈소사전) / 양계초 지음 이보상(李輔相) 번역 / 원제는 [흉가리 애국자 갈소사 전]이다. 헝가리의 애국자 헤수스에 대한 이야기.

48. 華盛頓傳 (화성돈전) / 이해조(李海朝) 번역 / 1908년 /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전기다.

49. 波蘭末年戰史 (파란 말년 전사) / 작자불명 / 폴란드 왕국 말년의 독립전쟁을 다룬 것으로 1905년에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50. 美國獨立史 (미국독립사) / 현은(玄隱) / 1899년

51. 埃及近世史 (애급 근세사) / 장지연 번역 / 1905년 / 이집트의 근세사를 기술함. 서문을 박은식이 썼다.

 

출처 - 초록불 이문영씨 블로그

 

이 목록을 발견한 사람은 문정창이라는 재야역사학자인데 이 사람은 공교롭게도 친일파이다.

 
















문정창

 

문정창()[1899~1980]은 1899년 경상남도 동래군[현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태어나 동래의 동명중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23년 동래군 서기를 거쳐 경상남도청, 조선총독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1943년 황해도 은율 군수, 1945년 황해도 사회과장 등을 역임하면서 일제 말기까지 30여 년 동안 조선총독부 관료로 부역하였다. 이때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 조사 자료 총서의 일환으로 몇 권의 저서를 내기도 했는데, 이 책들은 후에 문정창이 한국사를 연구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광복 후 월남하여 미군정 하에서 잠시 조선농회() 총무부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47년 공직에서 은퇴하고 개인 사업을 하면서 재야 역사가로 활동, 여러 권의 책을 냈다. 1976년에는 이유립(), 안호상(), 유봉영(), 임승국(), 박창암(), 박시인() 등과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여 ‘국사 바로잡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1980년 2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광복 후 문정창의 한국사 연구는 일제 침략사와 한국 고대사 연구에 치우쳐 있었다. 이는 일제 식민사학에 대한 기성 사학계의 도전이 불충분하다는 비판의 차원에서 시도된 것이다. 예를 들어 일제가 날조한 ‘반도 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없었다거나, 백제의 활동 무대가 중국 대륙이었다고 주장하였고, 심지어 가야와 수메르 문명의 유사성을 내세우는 등 한국사의 외연 확대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상에 침묵하는 사학계의 풍토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이를 소상히 밝힌 자신의 저서가 ‘일본인으로부터 받은 피해 계산서’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문정창의 한국사 연구의 뿌리는 일제 관료 시절 수집한 자료에 바탕을 두고 있는 만큼 이런 비판은 극히 모순적인 것이라 하겠다.

문정창이 쓴 주요 저서는 『산업 조합 설립까지(まで)』[1932], 『조선의 시장()』[인간사, 1941], 『조선 농촌 단체사()』[일본평론사, 1942], 『근세 일본의 조선 침탈사』[1964], 『군국 일본 조선 강점 삼십육년사』상·중·하[백문당, 1965~1967], 『단군 조선 사기 연구』[한뿌리, 1968], 『고조선사 연구』[백문당, 1969], 『일본 상고사』[백문당, 1970], 『한국 고대사』상·하[백문당, 1971], 『한국사의 연장-고대 일본사』[백문당, 1973], 『백제사』[인간사, 1976], 『이병도 저 한국 고대사 연구평』[백문당, 1976], 『광개토 대왕 훈적 비문론』[백문당, 1977], 『가야사』[백문당, 1978], 『한국-슈메르 이스라엘의 역사』[백문당, 1979] 등이다.

상훈과 추모

1932년 10월 국세 조사 기념장을 수상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이사관, 군수 등을 지낸 이력 때문에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정창 [文定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사람은 황당무계한 주장을 많이했고 환단고기를 저술한 이유립보다도 학문적으로 재야학계인사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병도보다 더한 친일파가 저런 책을 발견했다고 하면 말다한것이다. 그가 실제로 보았다는 문서도 존재하는데




[발해사] 대조영의 출신논란은?! 한국사

2007년 대하드라마 "대조영" 이 방영되면서 내 가슴깊은곳에 대 제국 "발해"에 대한 호기심과 애국심으로 공부를 하게 만들었다.

많은시간동안 다른역사 공부보다 "발해"에 대한 나의 공부시간이 더 많이 할애가 되었다. 즉 발해사를 연구하는것이야 말로 동북공정과 많은 고대역사의 잘못된점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오늘도 블로그에 내글을쓴다.

일단 대조영의 출신논란에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다. 그 이유는 구당서의 기록과 신당서의 기록이 판이하게 다르기때문이다.

<구당서> "발해말갈 대조영은 고려별종이다. "
<신당서>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써 고구려에 복속된 부족인데 성은 대씨였다." 라고 기술 하고 잇다.

이 두가지의 기록의 판이한 차이는 전부 "발해"를 말갈로 치부하여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것을 끊어내고 싶어했기때문이다.

일단 말갈에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말갈 7부족으로써 오랜 명맥과 관계를 유지해온 부족이다.

나는 이 두가지의 기록을 토대로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에 대한 추론을 해보고싶다.

1. 송화강 유역에 사는 "말갈계 고구려인" 즉 말갈이라는 용어는 송화강유역에사는 부족으로써 오랜기간동안 고구려에 복속된 사람이기때문에 당시 말갈계라고 하는것은 일종의 출신지라고 보는것이 합당할듯하다

EX)포항사람이 서울에서 20년살아도 출생지나 출신지는 포항이라는점

2. 말갈은 7개 부족이있는데 이 7개부족마다 전부다 다른계통의 말갈족이므로 "속말" 이라는 지역 즉 송화강유역에 사는 부족 이라는 해석으로 풀이할 수 잇다.

예맥족계열의 말갈부족 = "속말", "백산"
퉁구스족계열의 말갈부족 = "불녈","백돌","호실","흑수"."안차골"

중국이 주장하는 "발해는 중국의 역사이다" 어찌 논법적으로 본다면 그럴 수 도 있으나 내가 나열한 7개의 말갈부족으로 볼때 중국의 역사에는 예맥족을 동이족으로 보고있으며 예맥의 나라가 고구려, 신라, 백제 이기때문에 발해는 엄연히 우리역사에 포함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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